글렌데일 한인장로교회 (Glend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글렌데일 한인장로교회 (Glend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Inspiring Stories

성도 소개

 사랑의 빛을 발하시는 전영숙 집사님과 석현철 형제님

기도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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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원형(Christ Prototype) 나의 형상

주를 본받고 그의 영안에서 살아가라.

(사 40:28-31; 골 1:15-17)

 

      자연주의자들은 해수면 위의 어느 고도에 “뱀의 선”(snake line)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선을 실제하고 구체적이며 고정되어서 수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미국 뉴일글랜드 지방의 어떤 산악지대에서는 농장을 구매할때 반드시 던지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이 농장은 뱀의 선위에 위치하는가?” 그 선 아래에는 아마도 사람과 동물에 해를 끼치는 치명적인 파충류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위에는 뱀이 살지 못합니다. 그 선아래에서는, 사람이 파충류에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가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제가 군에서 솔로 비행을 마쳤을때, 중대장은 높이 날아라고 말했습니다.

낮은고도에서 비행하다 보면 안개속에 산이나 전선줄에 부딪혀 사고를 당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심리학은 우리에게도 뱀의 선과 유사한 저차원과 고차원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땅에 속한 한맺힌 태고유형의 낮은 차원이 있습니다. 또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원형의 높은 차원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만들었을때 하나의 원형, 곧 하나님 형상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깨어진 세상에서 어두운 한의 태고유형이 발생했습니다. 몰트만(Moltmann)은, 인간을 잡아매는 이상한 끈과 같은 어두움의 집단적인 세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두운 한의 태고유형들을 보신듯, 그리스도는 막 7:21이하에서 말씀하셨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 7:21-23). 이 악한 한의 태고유형을 감싸서 치유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원형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 사람의 원형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록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의 진짜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려주는 영이요, 생명주는 원형이십니다. 그리스도원형이라 할때, 이는 우리속에 이룰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우리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실재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의 태고유형은 죄로 깨어진 세상의 낮은 차원입니다. 여기서는 영혼의 기만자요 파괴자인 사탄의 공격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저희 집 지붕아래에 새들이 집을 짓고 삽니다. 어떤 새들은 전구소켙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보니 머리가 주황색인 한마리 작은 새가 그 꽈배기같은 전구에 꼬리가 꼬여서 파득파득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구는 그 새의 피로 칠해 있었습니다. 그 새는 스스로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거꾸로 달린 이 새는 그냥 방치해 두면 죽을 것입니다. 저는 조심해서 그 새를 빼내어, 살게 하여 주었습니다.

이 꽈배기 전구는 인간을 사로잡는 한맺힌 태고유형을 연상시킵니다.  

자연인과 육신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 태고유형의 사슬에 메여 있습니다. 상처와 허무라는 그물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죄악의 덫에 걸려 바동거립니다. 열등감이라는 사슬에 매여 마비가 됩니다. 후회라는 사슬에 메여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갈고리에 걸려 피를 흘립니다.

필자가 상담한 어떤 분은 자신이 땅을 사려할때, 부인이 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땅이 지금은 수억달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분은 그때 그것을 샀으면 자신의 팔자가 피었을 텐데,하며 만날때 마다 아쉬워했다. 그는 여러 해가 흘러도 그 상실의 슬픔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입에 달고 부르는 노래가 팔자타령이다.  

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한의 태고유형은 육신과 옛자아가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원형은 ‘내가 사나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작은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어두움의 태고유형에는 영적인 소모, 정욕,빈곤, 피로, 고갈, 우울, 낙심, 절망, 그리고 붕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원형 차원에는 거룩, 영적보충, 사랑, 기쁨, 용서, 풍성함, 안전, 성령의 능력과 인내와 영생이 있다.  바울은 이 높은 차원을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앉는 복(엡 2:6)이라고 기록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원형 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5).   

 

무디 기념교회 목사님이셨던 알란 레드파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금세기 초에 영국의 침례교 목사로서 대설교가 였던 메이어(F.B. Meyer)박사는 처음으로 잉글런드의 케직 사경회의 강사로 초대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영예로 생각했지만 선뜻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로 하나님과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기 사역에 영향이 갔습니다.

그런데 메이어 박사는 케직대회를 위한 메시지 전달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북잉글런드의 작은 타운이 있는 호수지대로 가서 산으로 올라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자기 문제를 놓고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절박한 기도가 나올때 까지 주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 이 문제 하나만 제외하고는 주께서 저의 생애의 모든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이제 저에게서 이 마지막 남은열쇠도 가지고 가시고 저의 모든 것을 다스리십시요!’

메이어 박사는 이 경험과 관련해서 나중에 케직 사경회때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주님이 어떻게 하신지 아십니까. 그 열쇠를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예 문을 제거해 버리셨답니다. 이제 내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나온 그리스도 원형안에서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원형으로부터 나온 자신의 참 형상을 이루어 갔습니다

  1.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으로서 우리를 살려주는 원형(a life-giving Prototype)입니다. 한 맺힌 태고유형을 이기려면 우리를 살려주는 원형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1)우리 마음속에 슬며시 기어들어오는 육체의 일들이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고 하였습니다.

많은 영혼들이 악한 영과 어두운 한의 태고유형에 갇혀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살려주는 영안에서 자유함을 얻게된다. 그리스도‘구세주는 악을 정복하고 사탄과 한의 태고유형(archetype)’을 무효화 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알고 괴로와 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했다.

그런데 죄와 죽음과 한의 태고유형에 갇혔던 그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하였음을 경험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한의 태고유형은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갇히게 하나, 그리스도원형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성령의법은 우리를 자유케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해준다(롬 7:23-8:2).

        2)어두운 태고유형에서의 흔한 몰락은 우리를 살려주는 그리스도 원형안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2013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는 37분 당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  

IMF 사태때 보다 심했던,  1930년대 초반의 대공황때, 많은 이들이 낙심하고 곤경에 처했다. 뉴욕의 맨하탄에서만 하루에 88명이 자살했다고 뉴욕의 신문들이 보도 했습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어떤 사람은 독가스를 마셨고, 다른 사람은 높은 빌딩에서 떨어졌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던지는 방법등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도 상실과 슬픔을 견뎌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찰스콜러는 다음과 같이 전해 줍니다. 대도시의 한 성공적인 사업가가 그의 사업과 집, 그리고 유동자산을 잃어버렸고, 거기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는 교회의 집사였고, 주일학교 교사였으며, 안내 팀장이었다. 주일 아침에 그는 예전처럼 밝게 인사 하면서 자기자리를 지켰고 주일 저녁이나 수요예배에도 잘 나왔다.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그가 재정적으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가 경제적 곤경 속에서 보인 불굴의 정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엇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해답은 그가 주님과 가진 친밀한 교제와 그로 인한 매일의 영적 갱신에 있다.  그는 기나긴 건기 때에도 마르지 않고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샘과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약간 떨어진 산에서 흐르는 풍부한 물로 인하여 샘이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상호관계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주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사야 40:28절에 말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할 때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미 영원을 사는 것이다. 천국의 기쁨과 생명과 치유를 체험하며 산다.

장은숙이라는 학생이 내 교수실로 들어 오면서, 하는 말이 “주님은 기도를 결코 물리치지 아니하셔요” 라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간암으로 아산병원에 다니며 투병중이었다. 의사는 혈관까지 전이되어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사형선고를 내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님이 히스기야 처림 매일 새벽기도에 나가 부르짖었다. 그후 다시 검진을 받았는데 그 병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고 의사가 입을 딱 벌렸다고 한다.  그리스도 원형안에서는 이미 하늘의 능력을 체험하고 산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삶의 비결을 고후 4:7-10에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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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때에 그리스도 원형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40:29-31에 이사야는 말합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피곤하고 무능한 자가 주변에 많습니다. 생명의 길로 가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영혼이 쇠진하고 실망합니다. 사람에게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실망으로 끝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하나님은 능으로 우리 영혼에서 우리를 강건케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기다리는 자는 새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산 편지’가 됩니다. 이런자는 신성한 기쁨을 얻습니다. 신실한 발언을 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간절히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27:1에,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간구할때 평안이 있습니다.

한 여학생이 자신은 염려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그러나 그리스도 원형안에서 점점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원형안에는 생명과 빛과 신뢰와 평안이 있다. 이러므로, 우리는, 고난속에서도,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사 30:15)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온전한 평안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께 바치면 그 후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내몸은 내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로 값주고 산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개역개정](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롬 12:1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너의 몸이란 너의 존재 자체를 육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온전히 드리라고 했습니다. 한번 드림으로 온전히 주님께 선물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드리면 부분적인 평온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드리면 전적인 평온이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때에, 영국 육군의 군종감을 역임하고, 서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었던 테일러 스미스 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아침에 잠을 깨면, 사지를 쭉 폅니다. 그리고는 ‘주님, 오늘도 이 침대는 저의 제단이고 제 몸은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자원을 물론이려니와 우리 몸까지도 주님의 처분에 맡기는 헌신의 자세가 모든 성도들의 일과표에 제일 먼저 올라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원형(Prototype)은 한의 태고유형(archetype)을 치유변화시킨다.

  그리스도 원형 차원에도 고난이 있고 우울하며 불안 할때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시편 71편에서 기자는 그리스도 원형안에서 자신이 당한 악한 한의 태고유형에서 어떻게 자유하게 되며, 승리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역경속에서도 체념하거나 팔자 타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했습니다. 고난중에도 자신의 힘이 되신 주를 기억하고, 찬송하고 영광돌릴것을 다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 71:6-8).

그는 임박한 죽음의 상황에서도 분노하거나 우울함이 없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더 찬양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여기서 “항상”이란 말은 영원히 지속됨을 일컽고, “더욱더욱’이란 점점 더 증가함을 의미한다. 그는 역경속에서라도, 끊임없이 소망을 품고, 주를 영원토록 더욱더욱 뜨겁게 찬양할 것이라 서원 한것입니다.

 

40:28-31 말합니다.

[개역개정](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인도의 어느 산골, 한 노인이 길을 가다가 동네 길가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시골집 마당에 닭들이 모이를 평화로이 쪼아 먹고 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마리가 닭이 아닌 독수리 임을 알았다.  그는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집의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내 아들이 2 년 전 산속에서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집으로 갖고 와서, 닭 우리에 넣었더니 암 닭이 부화하여 저렇게 독수리를 낳게 되었지요. 나는 저 독수리를 닭 모이로 키웠고 닭이 되도록 훈련시켰으므로, 저 독수리는 자신이 날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합니다. 독수리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아직도 저것은 독수리의 심장을 가졌고, 나는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것이 가능한지 알아 보는데 동의 하였다.

그 농부는 닭들과 함께 모이를 쪼고 있는 독수리에게 살짝 다가가서 두 손으로 움켜 쥐었다. 그리고 독수리를 그의 어깨위로 올린 후 독수리의 눈을 바라보며, 너는 독수리야, 너는 닭이 아니야. 너는 날 수 있어. 자 날개를 펴서 날아봐라고 말하며 공중으로 던졌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닭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헛간에서 흩어진 모이를 쪼고 있는 독수리를 붙잡아 그 집 지붕위로 올라 갔다. 그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너는 닭이 아니야, 너는 독수리야! 너는 날수 있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봐!라고 외치며 독수리를 지붕위로 던졌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개 한번 펴 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독수리는 저 노인이 자기를 해 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그 노인을 피해, 먼지 쌓인 마루 밑으로 깊이 숨어 버렸다. 노인은 이제 저 독수리를 붙드는 것 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닭 우리 속에 잠 자고 있는 독수리를 붙들었다. 그는 그 독수리를 그의 옆구리에 꼭 끼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독수리는 잠에서 깨어 났지만 이미 노인의 강한 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독수리는 바라보이는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전율하였다. 높은 산 위 절벽 위에 올라서자, 노인은 태양을 향해 독수리의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너는 독수리야. 너는 하늘에 속해 있어! 이제 날개를 펴고 네 맘껏 날아 보아라!, 독수리를 던져 올렸다. 날아볼 생각도 못하고, 추락하는 독수리는 공포 속에 눈을 꼭 감았다. 그때, 절벽을 스치는 바람이 독수리의 날개를 펼쳤고, 독수리는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묶어두었던 깃털을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하였을 때, 파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독수리는 저 아래절벽 위의 한 작은 노인이 너는 독수리야, 너는 닭이 아니야. 너는 하늘에 속해! 너는 날아 갈수 있어!라고 자기를 향해 외치는 것을 보면서, 강력한 날개를 휘저으며, 승리의 함성과 함께 하늘 위로 높이 날아 오르고 있었다.[1]

 

 

[1] Frankhauser, J. From a Chicken to an Eagle, (N.Y.: Coleman Publishing), 1982. 인용: 권오균 지음, 내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 참 자기(서울: 예영, 2007), pp.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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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표절에 대한 논란이 이민교회에 또 다시 불거졌다. 뉴욕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설교 표절로 인해 사임한 것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목회자의 설교 표절 문제가 교계에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남가주에서도 벨리 지역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설교 표절 시비에 지속적으로 회자된 적이 있고, 모 장로교단의 노회장까지 지냈다는 텍사스의 한 중형교회 S목사가 지속적으로 설교 표절을 하고 있다는 제보가 본지에 날아들기도 했다. 사실 설교표절 문제는 일부 목회자에게 국한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목회자들의 설교도용 시비가 있어왔다. 특히 요즘 같이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전한 21세기 환경에서 목회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른 목사의 설교와 정보 등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고, 반대로 본인의 설교가 표절이나 아니냐의 시비에 더 잘 노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달 3일부터 8일까지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교계에서는 김남중 교수(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목회실천신학 조교수)를 초청해 ‘현대 설교학에 근거한 창의적 설교 클리닉’ 세미나가 열었다. 특히 강의에 앞서 참가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두 편으로 나누어 ‘설교표절’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나누게 하는 등 강의의 이해와 효율성을 높여 90여명의 참가자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설교 표절을 반대하는 의견에는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자기 손으로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표절 설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닌 그에게 주신 말씀이다” “1% 표절이나 100% 표절이나 다 같은 도적질이다” “설교 표절은 중독성이 있으며, 불로소득이다”등의 내용이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표절에 대한 정의와 범위를 넓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받은 감동이 우리 교회 상황에 적절하다면 사용 가능하다” “설교 표절에 대한 기준이 학문적 표절과 달라야 한다” “설교 표절은 절도가 아니라 빌려 오는 것이다” “순수한 자기 설교는 없다”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사실 일반인에 비해 높은 도덕적 잣대(Moral Compass)가 요구되는 목사라는 성직자의 특성상 설교 표절은 목사 개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이요, 해당 교인들에게는 배신감마저 들게 하는 크나큰 아픔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로,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사역이며, 설교와 교육, 기도와 심방, 상담과 양육, 전도와 사회봉사 등 여러 직무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직무가 설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교육목회연구원 원장 나삼진 목사는 설교자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나 목사는 “어떤 교회에서는 회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준비와 자격에 관계없이 설교자로 세우는 일도 있다. 하지만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설교자는 대학을 마친 후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졸업한 후 총회가 주관하는 강도사 고시에 합격해야 자격을 얻는다. 다시 목사 고시를 거쳐 적어도 2-3년 동안 목회자로 훈련을 거쳐야 설교자로 설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생략될 가능성이 많은 한인교계에서는 설교 표절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또 신학대학원에서 논문 한 편 제대로 써보지 않고 졸업하는 현행 신학교육 체제로는 표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이어 나 목사는 “최근 문재인 정부가 구성될 때 여러 장관들이 논문 표절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20년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논문 표절이 오늘날에는 문제가 되어 장관에 임명되지 못하기도 하듯이, 목회자가 논문이나 설교 표절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최고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목회자에게 설교 표절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라고 꼬집으며,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단에 오르는 영광을 설교 표절로 망쳐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이상명 박사 역시 설교 표절은 심각한 부정행위라고 지적한다. 이 박사는 “현시대 목회자들 가운데 설교 표절로부터 자유로운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목회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치열한 말씀 묵상과 해석을 통해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여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기에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표절한다는 것은 심각한 부정행위다. 표절한 설교를 통해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목회자 자신은 물론 교회를 서서히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되고 만다”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목사의 설교에서 과연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서부터가 표절일까? 물론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는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세상에 무엇 하나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표절’이라는 -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따다 씀[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단어가 주는 “몰래 따다 쓴다”는 의미는 꽤 심각하게 다가온다. 전주 예수비전교회 이국진 목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설교 표절에 대한 기준이 애매해 그에 대한 정립의 필요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타인의 설교 원고를 거의 그대로 베끼는 행위, 타인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것처럼 각색하여 설교하는 행위, 타인의 책 내용이나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낸 창작물인 것처럼 표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표절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반면 널리 알려진 예화나 유머가 설교 흐름상 필요 하다면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고, 일반적인 기독교의 진리로 알려진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가능 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이상명 박사는 설교에 논문과 같은 엄정한 학술적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지만 남의 설교를 통째로 베낀다든지, 습관적으로 타인의 설교를 도용한다든지, 여러 편의 설교를 편집하여 자신의 설교로 만드는 행위가 대표적인 표절에 해당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 박사는 “세상보다 엄정한 기준과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 곳이 교회다. 세상은 지적 재산권 관련법을 제정하여 타인이 창조한 유무형의 지적 재산을 법으로 보호해 주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설교 표절이 만연해 있는 현실을 깊이 자성해야 한다. 설교 표절 문제가 되풀이되는 한 목회자의 신뢰는 물론 교회의 권위도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목회자의 설교 표절을 질타하기 전에 짚고 가야할 문제가 있다. 사실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설교가 과중되어 있다. 한 주 동안 적어도 공∙사적으로 세 번 이상,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경우는 열 번 이상의 설교를 한다. 이외에도 바쁜 사역, 목회자의 역할 변질, 설교 준비에 대한 의식 부족, 신학 교육의 패착, 교인들로부터 받는 중압감, 목회 성공에 대한 집착, 목회 윤리적 상실 등의 현실태를 개선하지 않는 한 설교 표절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수 있다. 각도는 좀 다르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 본다. 목사의 설교 표절만 문제가 되고, 다른 직분자들의 표절은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구역장의 구역예배에서 말씀 증거, 주일학교 교사들의 공과시간 가르침,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이들도 이때 만큼은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목회자들의 설교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이 행복한 설교를 어떻게 전할까?>의 저자 김영호 목사(감동시키는 설교연구원 원장)의 대답이 답변이 될 듯싶다. “넓은 의미에서 2천년 동안 모든 설교자가 설교표절을 하고 있다. 주일학교교사들은 공과책을 그대로 표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잘못될 수 도 있다” 김 목사는 목회자가 아닌 경우는 오히려 표절하지 않으면 잘못될 수도 있다고 충고한다. 김 목사는 “넓은 의미에서 2천년 동안 모든 설교자가 설교표절을 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들은 공과 책을 그대로 표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잘못될 수 도 있다. 일부분의 성경도 표절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내용이 똑같은 공관복음이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김 목사는 “그러나 도용 표절은 절망적인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고 인용을 밝히고 설교하라. 남의 설교를 문장 그대로 읽는다면 도적이 된다. 도용 표절설교는 설교자의 슬픔이다. 2천 년 동안의 광의적 표절설교도 역시 기독교의 슬픔이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각자의 설교개혁을 위해 피 나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눈이 열리게 되어야 한다. 눈이 열리면 간단하다. 예수님처럼 설교하면 된다. 왜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설교 작성법을 외면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찾는 자에게 찾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끝으로 쉐퍼드대학교 목회상담학 권오균 교수가 신학교 시절 아드리안 로저 목사로부터 경종을 받았던 설교를 소개한다. 즉,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전쟁에서 패하였을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4:3)’하며 언약궤를 가져왔다. 이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이길 줄 알고 다시 싸웠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은 크게 패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다(삼상 4:11).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말씀궤’만 가져다 놓으면 승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결과는 패배였다. 오늘날 설교자 중에도 남의 설교를 그대로 가져다가 제단에서 전하면 능력이 나타날 것으로 알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요 표절이다.” 권 교수는 “성경 본문을 스스로 공부 한 후에 진액이 우러나오는데, 그 진액이 설교자가 전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 하다 보니 표절시비가 나오는 듯하다. 좋은 설교를 듣고 영감을 얻어 기도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깨달음을 전한다면 이는 새로운 창조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설교자의 삶이 하나님 말씀의 현현일 때 그 설교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설교자가 인간적인 생각이나 자신과 관계없는 남의 설교로 회중을 감화시키려 하면 두려운 일이다”라고 경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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